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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23 15:44
이 땅에서 지옥 허물며 천국 세우기-박남훈(문학평론가, 주안교회 담임목사)
 글쓴이 : 金德圭
조회 : 656  
-김덕규의 시세계

1
필리핀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프랭크 루박은 그의 저서 『권능의 통로』(규장)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지옥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천국이 임하  여 지옥을 몰아내기 전까지는 우리가 지옥에 있다는 것도 모른다. 지옥과    천국은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둘 다 우리 안에 있다. 그리스  도가 우리 밖에 계실 때는 지옥이 우리 안에 있다(106면).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필자는 독서 중에 희귀하게 경험하게 되는 깨달음의 희열과 공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리고 우리들은 대부분 지옥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천국이 임하여 지옥을 몰아내기 전까지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옥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아 가고 있다!
-지옥과 천국은 사후에 내가 들어갈 곳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밖에 계실 때 지옥은 내 안에 엄연히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내 안에 천국이 임하여 지옥을 몰아내기 전까지는, 예수께서 내 삶의 주인으로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나는 내 자신이 지옥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 자신의 신앙이 좋다고 믿고 나도 사랑이 없지 않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러지 않겠는가…. 

시평의 시작 부분에서 나는 왜 이런 넋두리를 늘어 놓고 있는가. 이유가 있다. 김덕규 시인의 시평 청탁을 받고 그의 시들을 읽어나가던 중 문득 조금 전에 인용했던 프랭크 루박의 글이 내 머리 속에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이후로 이 글에서 ‘김덕규 시인’은 ‘김덕규’로 명명되는데, 이 명명은 예사낮춤이 아니라 객관적 해석 대상을 의미한다). 그때 경험했던 그 깨달음의 희열과 공감이 도대체 왜 김덕규의 시들을 읽었을 때 다시 떠오른 것일까, 퍽이나 의아하게 생각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나는 늦게서야 깨달았다. 김덕규의 시들이 프랭크 루박이 말한 것과 거의 비슷한 메시지를, 혹은 인식을 담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프랭크 루박을 읽은 후에 김덕규를 읽게 된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김덕규의 두 번째 시집 <봉화>에 나오는 첫 번째 시, <용서를 구합니다>를 읽어보자

 북녘에 사는 그대들이여
 저를 용서하소서.

 사람 삼백만이 굶어 죽어 가는 것도 모르고
 저는 삼시 세끼 밥 잘 챙겨 먹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폭압정권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구금되어 강제노역과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온갖 학대와 고초를
 지금도 당하고 있는데
 오늘도 제가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하느라고 하루를 다 보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간 어린 자매들이
 인신매매로 온갖 능욕을 당하고,
 탈북한 이들을 포박하여 짐승처럼 끌고 북으로 데려간다는
 보도를 듣고서도 무덤덤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옥참상을 보다 못한 우방국들이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고,
 국제연합도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
 한국 국회가 여태 북한인권법 제정을 합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정말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북녘 동포들이여,
 제가 그대들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저의 이 무지와 무정함과 불의함을

 용서해주소서
 용서해주소서
 용서해주소서

 이 땅에 정착한 이만 육천 명의 탈북민들과
 그 땅에 살고 있는 이천오백만 동포들께
 이렇게 무릎 꿇고 비오니

 제발
 저를 용서해 주소서
 내 형제 자매여
 내 혈육이여.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왜 이 시인이 이렇게 탈북민들과 북녘 땅의 동포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지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그가 탈북민들과 북녘 동포들에게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이건 감정의 과잉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집에 실린 그의 시들을 다 읽고나서도 나는 한동안 이런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프랭크 루박의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고, 비로소 그때서야 나는 왜 이 시인이 이렇게 탈북민들과 북녘 동포들에게 무릎 꿇고 빌면서 용서를 구하고 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프랭크 루박의 표현대로 우리는 지금 지옥에 있으면서도 그 지옥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으로 우리가 지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북녘의 ‘지옥참상’ 자체가 지옥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옥은 북녘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은 “이러한 지옥참상을 보다 못한 우방국들이 북한인권법을 제정하고,/국제연합도 북한인권결의안을 채택하였으나/한국 국회가 여태 북한인권법 제정을 합의하지 못한 것에 대해/정말 아무런 분노도 느끼지 못했습니다.”라는 제4연에 나오는 표현처럼 북한인권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시인 자신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시인은 그동안 너무나 익숙해져서 북한인권 문제에 관심과 사람을 갖지 못하고 지내왔던 자신 안의 ‘지옥’-‘저의 이 무지와 무정함과 불의함’-을 문득 깨닫고 통곡하며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서를 구합니다>라는 시는 북녘의 지옥뿐 아니라 대한민국과 시인 자신 속에 들어 있던 무관심과 비정함과 불의함의 지옥을 깨닫고 회개하고 통곡하고 있는 분단 시대의 애가다.
         
 북녘 동포들이여,
 제가 그대들을 위하여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저의 이 무지와 무정함과 불의함을

 용서해주소서
 용서해주소서
 용서해주소서

 이 땅에 정착한 이만 육천 명의 탈북민들과
 그 땅에 살고 있는 이천오백만 동포들께
 이렇게 무릎 꿇고 비오니

 제발
 저를 용서해 주소서
 내 형제 자매여
 내 혈육이여.

김덕규는 자신 속에 존재하는 ‘지옥’-‘무지와 무정함과 불의함’을 깨닫고 그 ‘지옥’을 자신 속에서부터 허무는 작업을 다른 시들 속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깨어 있고 싶다>는 그런 그의 노력을 보여주는 시들 중의 하나다.

 북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무고한 이들이 처형을 당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태연히 잘 먹고 잘 잘 수 있다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엄연한 사실이 결코 없는 것으로 될 수 없는 것

 이 부자유스러운 자유
 이 꺼림칙한 풍요
 이 불의를 외면하는 관성적인 안락한 삶

 단 일분일초만이라도
 이를 부정하고
 깨어 있을 수는 없단 말인가.

김덕규는 무지하고 무정하고 불의한 ‘지옥’이 자신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끊임없이 이 ‘지옥’을 허무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 자신 속에 있던 그 지옥은, ‘이 부자유스러운 자유/이 꺼림칙한 풍요/이 불의를 외면하는 관성적인 안락한 삶’이기에, 그는 그 삶을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지속적으로 깨어있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노력이 김덕규의 삶에서 탈북민과 북한동포를 돕는 사역으로, 그리고 지옥을 허물며 천국을 세워가는 글쓰기, 곧  시작(詩作) 행위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김덕규에게 시는 세상의 지옥, 그리고 그 자신 속에 들어온 지옥을 부정하면서 깨어 있기 위한 혼적 영적 노력의 흔적이다. <눈 오는 날>은 그의 시의 지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눈길로 나서는 것은
 눈을 맞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 눈처럼
 깨끗해지고 싶은 것

 내 속에
 씻어도
 씻어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기에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눈밭을 뒹구는 것.

그는 ‘이 눈처럼/깨끗해지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다. 자신 속에 ‘씻어도/씻어도/씻어도/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기에’, 죄의 본성이 있고 지옥이 있기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나 익숙해지고 친숙해져버린 지옥이 있기에, 그는 ‘이렇게/이렇게/이렇게 눈밭을 뒹구는 것’이다. 자신의 지옥을 허물고 ‘이 눈처럼’ 깨끗한 순결의 천국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 주위에, 대한민국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지옥인지도 모르고 지옥 속에서 가짜 천국에 자족하며 살아가는 대한민국 이 땅에 진정한 천국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지옥을 각성하고 허무는 작업이 그의 내면에서 지속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김덕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고 사는 제자이고 기도(祈禱)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집을 내면서>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북녘에서 나지도 않았고
 두고 온 자식조차도 없는데

 그 곳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프다

김덕규에게 북녘 땅은 출생지가 아니다. 거기에 두고 온 자식도 없다. 그렇지만 그는 ‘그 곳/그 사람들을/생각’할 때마다 늘 마음이 아프다. 그 아픔은 사랑이고 연민이다. 그러니까 그가 북녘 동포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픈 이유는 그가 하나님 사랑을 품고 이웃을 향해 사랑을 나누는 삶을 지향하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직으로 하늘로 뚫려 있으며 또한 수평으로 이웃으로 열려 있는 신실한 신앙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만이 느끼는 아픔을 앓고 있으며, 그런 아픔으로 간절히 기도한다.

 그 아픔이 없었다면
 ‘살아만 있어다오’ 외칠 수 있었을까

 뭇 사람들의 그 외침이 없었다면
 아홉 명의 탈북 청소년들 살아남지 못했을 것

 그렇다
 이제는 더 큰 기적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욱
 하늘 향해
 부르짖어야 한다

 단비를 내려다 줄 구름 한 조각이
 마른하늘에 떠오르도록
 깊은 밤을 끝낼 실 날 같은 새벽빛이
 그 땅에 비치도록.

김덕규는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행동하는 모임에서 한 중심축을 맡고 있는 실천적 행동인이기도 하지만, 통일이 결코 그런 인간들의 행동이나 바람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김덕규 속에는 통곡하며 애가를 부르는 예레미야도 있고,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하는 엘리야도 있다. 그의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봉화(烽火)>라는 시는 이 땅에서 지옥을 허물기 위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며 통곡하며 회개한 자가 세우려는 천국의 영광의 한 파편을 보여주고 있다. 지옥의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의 불씨들이 장엄하게 타오르고 부활하는 통일된 조국의 위광을 김덕규는 오늘도 꿈꾸고 있다.

 불을 올려라

 산에 올라
 돌을 주어 단을 만들고
 마른 나무 모아다가
 불을 지펴라

 불아
 활활 타오르라

 설악산 향로봉에
 이 불 오르면

 금강산 비로봉에도
 불꽃 피어오르리라

 어둠이 가득한
 북녘
 단숨에 밝아져라

 모질게도 서러운
 삼백만 꽃송이 이름없이 묻힌 땅
 그
 배고픔
 슬픔
 아픔
 다 태워라

 압록강 두만강 두꺼운 얼음 녹여
 그 속에 가두어진
 그
 비명
 절규
 신음
 한 마디도 빠짐없이 다 살려내라

 마침내
 백두봉에 봉화 타올라
 한라 백두 장엄한 불씨들이
 삼천리 반도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으리니

 그 날을 볼 때 까지
 하늘 향해 꿇은 이 무릎 펴지 않으리라
 두 눈 감지 못하리라

 부디
 활활 타 오르게 하소서
 모든 이들이 열망하는 생명의 불꽃을,
 일으켜 세우소서
 부활의 불기둥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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