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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09 20:19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
 글쓴이 : 金德圭
조회 : 2,176  
모처럼 여운이 남는 글을 읽었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모처럼 소설을 읽었고 또 그 글이 여운을 남겼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깊은 강>이 그 소설이다.

왜 그 소설이 나의 마음 한 구석에 다분히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지금도 무엇이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들을 남겨둘까?
작가가 바라나시(Varanasi)의 갠지스 강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그대로 나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일까?
주인공 오쓰의  신앙을 구현하려는 치열한 삶 때문에 그러하였을까?

소설가는 정말로 처절할 정도의 그 깊은 강에 대한 인상을 자세히 묘사하므로 그 글을 읽는 나를 그 현장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의 심각한 문제의식까지 나에게 감염시켰다.

같은 문화권의 작가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주제가 우선 나에게 친근해서 좋았다. <깊은 강>을 읽고 난 후 읽고 있는 헨리 나우엔의 <상처입은 치유자>가 다루는 주제가 다소 생소한 느낌이 들어서 더욱 대비가 되었다.

소설은 그 첫 페이지에 흑인 영가 <깊은 강> 노랫말의 둘째 소절을 들려줌으로 시작되고 있다.

흑인영가 <깊은 강>의 영어 가사와 이를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Deep river, My home is over Jordan
Deep river, Lord, I want to cross over into campground

Oh don't you want to go to that gospel feast
That promised land where all is peace?

Oh! deep river, Lord, I want to cross over into campground


내 고향은  깊은 요단강 건너 있네
주님,
저 깊은 강을 건너, 믿음의 그 땅으로 건너가고 싶습니다.

오 그대들은 같이 가고 싶지 않는가
평화가 넘치는 약속의 땅, 은혜의 축제가 넘치는 그 곳을

오, 주님
이 깊은 강을 건너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그 축복의 땅으로 건너가고 싶습니다.

<깊은 강>은그리운 고향에 가고 싶지만 도저히 갈 수 없게 하는 현실에 대한 깊은 탄원을 노래하고 있다. 노랫말을 지은 이의 고향은 우리 누구나가 꿈꾸는 그런 고향이지만 또한 노래를 부르는 이가 속한 믿음의 공동체의 고향이기도 하다.
내 고향이 아니라 우리의 고향, 믿음의 형제자매들의 고향, 은혜가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그 고향에 가고 싶지만 그 고향을 가지 못하게 하는 너무나 높은 장벽, 사회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어쩌면 죽어서야만 갈 수 있는, 현실에서는 실현성이 도무지 없어 보이는 그 귀향....
그러나 그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현실을 뛰어 넘을 수 있도록, 건너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하게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흑인영가 <깊은 강>에서의 깊은 강은 자신들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을 상징하는 시어이다. 이에 비하여 엔도에게 바라나시의 갠지스 깊은 강은 가지가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그 모든 아픔과 상처와 기억들을 다 담고, 다  안고, 흘러감으로써 그 모든 것을 치유하고, 해소하고, 해결하는 거대한 하나님의 품이다.

엔도는 하나님이란 이름을 거론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는 사람들, 그 들의 영적 무지와 어리광을 <깊은 강>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사실 주인공 오쓰와 저자 엔도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쓰는 신이 부담스러우면 신이라는 이름 대신에 ‘양파’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 가지도 허용한다. 어쩌면 신을 굉장히 모독하는 듯한 처신일 수 있지만 그는 그 것을 기꺼이 감수한다. 신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그 신을 이해할 때 까지 그 신이 바로 우리들 모두의 삶에 밀접한 존재임을 알 수 만 있다면 설혹 다른 믿는 사람이 보면 신을 모독하는 것처럼 보이는 처사일지라도 그는 그 것을 기어코 감수 하겠다는 것이다.

소설의 종말부에서 오쓰는 심한 부상을 입고 자신이 주검들을 담아 갠지스 강으로 날랐던 그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가게 된다. 그의 회생이 기대될 수 없다는, 마지막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문장들로 소설은 끝이 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니 우리들은 진정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이 주님이 보시고 환히 웃는 그러한 삶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엔도가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그의 속내일까?

헨리 나우엔은 그의 역작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말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을 진실하게 사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방법이나 형식은 다양합니다" 

엔도와 나우엔의 지향점은 비슷한 것일까?

그러나 왜 엔도의 말은 나의 심장에 파고드는데 나우엔의 말은 머리에서만 맴도는 것일까?
소설과 수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인가?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인가?
내가 아직 나우엔의 말을 이해할 정도로 성숙하지 못해서 일까?

아무래도  나우엔의 책을 끝까지 다 읽기 힘 들 것 같다. 우선  엔도의 초기 작품인 <침묵>을 구해서 읽어 봐야겠다.

유족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작품, <침묵>과 <깊은 강>을 그의 주검과 함께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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