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믿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나의 고백(2)
金德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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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3일 새벽
이른 새벽에 깨지 않았으면
나를 못 만났을 것이다.
그러면 절대자 또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믿음은 매우 익숙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지하철도를 이용하거나 다리를 건널 때 지하터널이나 다리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배나 비행기를 타고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왜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일까.
지하터널이나 다리가 안전하게 시공되었기에 이변이 없다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뢰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나 비행기가 고장이나 천재지변이 없다면 운항 중 사고가 생기기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나 확신은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일까. 과학과 기술이 정확하고 정밀한 것으로 입증된 것이기에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신뢰는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기존 믿음이 더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존 믿음은 주로 자연현상을 직접 체험하므로 가지게 된 것이다. 해가 동쪽에 뜨면 서쪽으로 진다는 것, 달이 차면 기운다는 것. 추운 겨울을 잘 버터내면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예이다.
기존 믿음에는 사물을 잘 관찰하므로 얻게 된 믿음 뿐 아니라 인간에 관한 믿음도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을 간접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예외 없이 죽는 다는 미래의 사건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사람은 다 죽는 다는 보편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믿음의 일종인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믿음의 확장은 언제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 인간의 근원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이 있고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때 까지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공기나 물이 없었다면 현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기나 물이 분명 생명체 보다 먼저 존재했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공기나 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그 처음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구약(舊約) 과 신약(新約) 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 성경은 서른아홉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 책이 창세기(創世記)이다. 이 책은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기술로 시작한다. 태초에 관한, 근원에 관한 의문들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장의 주어인 하나님은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인 신의 이름이다. 목적어인 천지(天地)는 하늘과 땅이라는 뜻이지만 천지에 산재한 만물(萬物)을 의미한다. 오늘날 의미로는 신이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을 창조하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물질 안에는 당연히 최초의 인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신이 공기도 물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첫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문장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다면 신은 인류의 조상을 태어나게(?) 한 분이며 결국 나를 태어나게 한 분, 나의 존재의 원인인 분이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은 단순명료하다. 동시에 매우 강렬한 인상을 뇌리에 심어준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설명을 애써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찬찬히 자세하게 말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의 창조자를 알아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한테 내가 네 아버지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또한 이 문장은 인간 자신에게 깊은 자각(自覺)을 하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뚜렷이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인식이다. 이는 하늘과 땅 만큼 높고, 깊고 , 넓은 간극이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관계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경험하는 세상이 넓어질수록 믿음 또한 확장되었다.
자신의 존재 근원을 고민하며 추적하다보면 결국 절대자를 만나게 된다. 그 절대자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내 생명의 근원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놀랍고 또한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 그러나 지금까지 믿음이 순조롭게 확장되었다면 왜 신을 믿는 일에는 이와는 달리 주저함과 거부함이 생기는 것일까.
만약 신을 믿은 것이 선한 것이라면 왜 선한 선택에 이렇게 많은 고민이 있을까. 혹 내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악한 존재일지 모른다.
이른 새벽에 깨지 않았으면
나를 못 만났을 것이다.
그러면 절대자 또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믿음은 매우 익숙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지하철도를 이용하거나 다리를 건널 때 지하터널이나 다리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배나 비행기를 타고 갈 때도 마찬가지이다. 왜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일까.
지하터널이나 다리가 안전하게 시공되었기에 이변이 없다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신뢰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나 비행기가 고장이나 천재지변이 없다면 운항 중 사고가 생기기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나 확신은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일까. 과학과 기술이 정확하고 정밀한 것으로 입증된 것이기에 믿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신뢰는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기존 믿음이 더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존 믿음은 주로 자연현상을 직접 체험하므로 가지게 된 것이다. 해가 동쪽에 뜨면 서쪽으로 진다는 것, 달이 차면 기운다는 것. 추운 겨울을 잘 버터내면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예이다.
기존 믿음에는 사물을 잘 관찰하므로 얻게 된 믿음 뿐 아니라 인간에 관한 믿음도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을 간접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도 예외 없이 죽는 다는 미래의 사건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사람은 다 죽는 다는 보편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믿음의 일종인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믿음의 확장은 언제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 인간의 근원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이 있고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때 까지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공기나 물이 없었다면 현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기나 물이 분명 생명체 보다 먼저 존재했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공기나 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그 처음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구약(舊約) 과 신약(新約) 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 성경은 서른아홉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번째 책이 창세기(創世記)이다. 이 책은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기술로 시작한다. 태초에 관한, 근원에 관한 의문들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장의 주어인 하나님은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인 신의 이름이다. 목적어인 천지(天地)는 하늘과 땅이라는 뜻이지만 천지에 산재한 만물(萬物)을 의미한다. 오늘날 의미로는 신이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을 창조하였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물질 안에는 당연히 최초의 인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신이 공기도 물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첫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문장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다면 신은 인류의 조상을 태어나게(?) 한 분이며 결국 나를 태어나게 한 분, 나의 존재의 원인인 분이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은 단순명료하다. 동시에 매우 강렬한 인상을 뇌리에 심어준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설명을 애써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찬찬히 자세하게 말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의 창조자를 알아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한테 내가 네 아버지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또한 이 문장은 인간 자신에게 깊은 자각(自覺)을 하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뚜렷이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인식이다. 이는 하늘과 땅 만큼 높고, 깊고 , 넓은 간극이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관계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경험하는 세상이 넓어질수록 믿음 또한 확장되었다.
자신의 존재 근원을 고민하며 추적하다보면 결국 절대자를 만나게 된다. 그 절대자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내 생명의 근원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놀랍고 또한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 그러나 지금까지 믿음이 순조롭게 확장되었다면 왜 신을 믿는 일에는 이와는 달리 주저함과 거부함이 생기는 것일까.
만약 신을 믿은 것이 선한 것이라면 왜 선한 선택에 이렇게 많은 고민이 있을까. 혹 내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악한 존재일지 모른다.